밖으로

제주 큐레이션

시간을 쪼개고 뭔가를 하려는 강박에 시달리기보다
요즘 내 기분대로 제주를 발견해나가는 것,
그게 진화한 제주 여행법이다.

‘누구나’보다는 ‘나만의’ 콘텐츠가 중요해진 시대. 언제든 갈 수 있고 가도 좋은 최전방의 섬, 제주.
요즘 제주는 보여주기식 여행의 단물이 빠지면서 새로운 여행법의 궤도를 타고 있다. 오션뷰에만 목매던 이들이 산간 마을에 숙소를 잡고, 지리적으로 취약한 카페가 되레 문전성시를 이룬다. 오히려 제주가 묻는다. 바로 당신은. 이곳을. 어떻게 즐기고 싶지?

알아갈수록 다른 바이브인 제주엔 역시 바다가 있다. 사면이 남다른 바다다. 섬 중앙의 안주인인 한라산으로 향하는 사이 숨겨진 비경의 숲과 오름이 빽빽이 몸을 세운다. 제주에서만 접할 수 있는 전시관이 문화적 갈증을 채우고, 별처럼 뿌려진 카페와 로컬 식당이 다른 취향을 저격하고 있다. 총 21코스로 업그레이드한 제주 올레길은 가파도, 추자도 등 본섬 밖으로의 외도로 이어지면서 맞춤형 걷기를 부추긴다. 코로나19로 붐업한 차박 캠핑도 인기 가도를 달린다. 인천, 부산, 목포, 여수, 진도, 고흥, 완도를 비롯한 7곳에서 자동차를 실은 배가 제주로 출항한다. 분위기 파악은 여기까지, 오늘의 제주를 제대로 발견하러 가볼까.

걷는 제주

걷기의 3가지 그루브

여러 번 방문하기에 또 다른 제주에 대한 니즈가 강해진 시점, 그 선발 주자는 역시 걷기 코스다. 놀멍쉬멍 걷기의 교과서인 ‘제주올레’ 트레일은 대부분 바다를 낀다. 여기에 제주 방언으로 ‘웃드르’라 불리는 산간 지역이 변수로 끼어들었다. 오롯이 숲길만 걷느냐, 바다를 끼고 도느냐, 혹은 욕심내어 예술을 겸한 산책을 하느냐의 기로에 선다.

일단 숲길이다. 여전히 손꼽히는 ‘비자림’의 아성에 도전하는 숲이 속속 발견되고 있다. 넷플릭스 영화 <킹덤 : 아신전>으로 재조명된 ‘머체왓숲길’과 ‘곶자왈’ ‘교래자연휴양림’은 비현실적인 원시림의 세계로 이끈다. 현재 9개 구간이 조성된 한라산 둘레길은 시즌에 따라 골라 찾는 묘미가 있다. 여름에 더욱 청량한 ‘사려니숲’, 가을의 오색 단풍으로 물드는 ‘천아숲길’은 하드보일드 트레커의 구미를 당긴다.

비밀 숲캉스를 원하는 이들 사이에 점점 입소문이 번진다. 무조건 예약제로, 하루 탐방 인원이 제한된다. 숲으로부터 특별한 초대를 받는 기분. ‘서귀포 치유의 숲’은 구석구석 잘 짜인 덱을 따라 울창한 숲길을 헤치고 들어가 야외 베드에 누워 산림욕을 즐기는 낙원이다.
‘한남 시험림’은 국립산림과학원에서 난대, 아열대 기후에 적합한 산림을 실험하는 특별 관리소로 아직 여행자의 손을 덜 타 야생의 숲속을 탐험하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종일 비가 내려 여행 코스를 변경해야 한다면 숲길로. 키 큰 나무는 어지간한 빗방울을 가리고, 펌프질하는 피톤치드의 향이 몸과 마음을 감싸안아줄 것이다.

두 번째는 바다를 끼고 걷는 길이다. 바다와 숲의 이중주인 ‘송악산 둘레길’의 다른 옵션으로, 섬 속의 섬을 여행한다. 나긋나긋한 숲길과 달리 사시사철 바람이 주무르는 길이다. 관광 열풍에 몸살을 앓는 동쪽의 ‘우도’보다 서쪽의 ‘비양도’와 ‘차귀도’로 방향을 트는 게 좋겠다.

비양도(우도에서 걸어 들어가는 같은 이름의 섬이 있으나 인프라가 약하다)는 에메랄드빛 바다와 기암괴석을 옆에 끼고 걷는 해안 둘레길과 비양봉 탐방로가 있다. 차귀도는 비양도처럼 한적하지만, 봄의 푸르른 청보리로 시작해 유채꽃과 수국, 코스모스 등 사계절 내내 꽃을 만끽하는 길을 펼친다.

마지막으로 빼놓을 수 없는 걷기는 웰니스 아트 투어. 자연에 예술을 더한 레벨업 걷기다.
행선지는 섬의 동쪽과 서쪽 정반대 편에 나뉜다. 동쪽으로는 피너츠 캐릭터가 안내하는 환상적인 생태 정원 ‘스누피가든’과 바로 옆 ‘아부오름’을 한 세트로 묶어 알찬 하루를 보낼 수 있다.
시간이 된다면 태초의 제주를 이야기하는 ‘돌문화공원’까지. 서쪽이라면 저지문화예술인마을이다. ‘제주현대미술관’을 필두로 몰입형 미디어 전시관인 ‘문화예술 공공수장고’에 이르기까지, 예술 작품이 곶자왈의 정취와 공존하는 형태다. 수풍석 미술관, 방주교회 등으로 익숙한 건축가 이타미준의 ‘유동룡 미술관’은 유선형 계단을 올라 그의 철학을 읽고, 통창으로 살아 있는 제주 지형을 이해하는 감상 포인트를 안배했다. ‘제주도립 김창열 미술관’은 빛의 방향에 따라 무지개를 그리는 안뜰의 분수대(빛의 중정)에 이어 완만한 동쪽 성산 바다 풍광이 압권인 광치기해변.경사로를 통해 옥외 풍경 산책이 이어진다. 걷는 게 예술이라는 듯.

다른 제주

먹고 마시고 자는데 이왕이면 한정판

오늘도 SNS 채널에선 먹킷리스트가 쏟아지는 가운데 노포 식당의 저력은 건재하다. 한자리에서 55년째인 ‘복집식당’(제주시 비룡길 5)은 갈칫국의 원조로, 70년째인 모슬포항의 ‘영해식당’(서귀포시 대정읍 하모상가로 34-2)은 입에서 살살 녹는 수육으로 로컬 식당 추천 리스트에선 빠지지 않는 그랜드슬램을 달성하고 있다.

더 특별한 경험을 원하는 식도락가들에게는 제주식 파인 다이닝이 잘박잘박 인기를 얻는 중이다.
제철 식자재만 쓰는 이탤리언 비스트로 ‘더스푼’(0507-1404-1324)이나 오마카세 ‘스시 호시카이’(064-713-8838)는 입소문 난 지 오래다. 중산간 돌담 주택에 터를 닦은 ‘몰츠’(@moltz_jeju)는 문어 샐러드에 얹힌 두툼한 다리와 잠봉&부라타 치즈 피자로 브런치계를 평정 중이다. 모두 예약제다.

오션뷰 위주로 줄 서던 카페의 인기는 저마다의 독특한 개성을 닦은 공간으로 옮겨가고 있다.
낮은 조도와 안정감을 주는 인테리어는 힐링에 맞춰졌다. 블렌딩 찻집 ‘토템오어’(제주시 한경면 용금로 440)는 주중 4일, 매일 6시간만 누리는 감성 멋집이다. 감자 창고를 개조한 ‘그레이그로브’(서귀포시 안덕면 형제해안로 70)는 동굴 안에서 아인슈페너 맛에 집중해 탐닉하도록 한다.
자연주의 정원 카페 ‘베케’(서귀포시 효돈로 54)의 낮은 바(bar)에서는 통창을 올려다보게 된다.
자연에 경외감을 품도록 한 설계다. 한정판의 욕구는 숙박의 방식도 다양하고 극적으로 바꿔놓았다. 인적 드문 중산간의 독채 펜션, 감귤밭 한가운데 덩그러니 놓은 돌집, 불편함을 즐기는 차박 캠핑이 동시에 대세다. 흔적을 남기지 않는 아웃도어 ‘LNT(Leave No Trace)’ 유행 속 붉은오름, 교래, 절물 등의 휴양림과 함덕, 금능 해변 캠핑장의 텐트가 만들어내는 그림, 텐풍에 가슴이 설렌다. 제주도 푸른밤 그 별 아래.

글 강미승 사진 이채현, 언스플래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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